Categories
최신뉴스

K-콘텐츠의 깊이와 확장: 삶의 애환을 비추는 거울에서 글로벌 공동 창작으로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흔한 타임루프물이 지닌 판타지적 쾌감을 쫓지 않는다. 25살 혜자가 시계의 힘을 남용하다 하루아침에 노인이 되어버리는 기막힌 설정은 오히려 늙음과 노년을 뼈아프게 성찰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극은 ‘김혜자 헌정 드라마’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배우 김혜자가 지닌 다층적인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수십 년간 “그래 이 맛이야”를 외치던 푸근한 국민 어머니의 얼굴 이면에 새치름한 소녀의 순박함과 히스테릭한 예민함이 공존하며 극의 입체감을 더한다. 단역과 조연들을 활용한 강도 높은 코미디, 특히 손호준의 몸을 사리지 않는 망가지는 연기는 극의 균형을 절묘하게 잡아준다.

갑작스러운 노화는 참혹하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굳은 몸, 매일같이 챙겨 먹어야 하는 쏟아지는 약봉지 속에서 노년의 일상은 마치 좁은 양식장의 연어처럼 무기력해진다. 젊음의 찬란함을 뒤늦게 깨달은 혜자가 모든 것이 한낱 꿈임을 알고 쏟아내는 눈물은 그래서 더 시리다. 요실금을 부정하며 물조차 마시지 않는 샤넬 할머니의 고집이나, 늙음을 그저 ‘아기 때로 돌아가는 것’이라 애써 포장하는 엄마 앞에서의 씁쓸한 웅얼거림은 몸과 마음의 불일치로 고통받는 노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사회적 혐오와 가난이 짓누르는 청춘의 무게

이 작품 속 노년은 단순한 고독을 넘어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다. 혜자를 향해 “곤지암 귀신”이라며 쏟아지는 인터넷 방송 구독자들의 조롱이나, 집값 하락을 우려해 요양원 건립을 결사반대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를 명확히 방증한다. 마땅한 노인 복지 시설이 혐오 시설로 전락한 탓에, 갈 곳 잃은 노인들이 상술인 줄 알면서도 온정 때문에 건강식품을 강매하는 홍보관을 ‘노치원(노인유치원)’ 삼아 모여드는 현실은 참담하지만 분명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서늘한 시선은 가난한 청춘에게도 동일하게 향한다. 워킹푸어 부모를 둔 혜자의 오빠는 취업을 포기한 채 삼겹살을 먹으려 헌혈하고 받은 표로 고기를 사서 밀폐된 방에서 굽다 질식할 정도로 처절하게 식탐과 싸우는 백수다. 조손가정에서 자란 준하는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언론고시를 준비하지만 끝내 기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환멸에 빠진다. 지독한 가난이 혈육의 정마저 파괴해버린 준하의 서사는 혜자네 가족의 단란함과 대비되며 한층 더 깊은 절망을 묘사한다.

자신이 ‘후지다’는 것을 깨달은 혜자는 결국 아나운서의 꿈을 접지만, 노인이 된 후 변화된 처지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과거 성인물 더빙을 했던 엉뚱한 재능을 살려 마트에서 판매 방송을 하거나 궂은일을 시작한다. 이는 경력 단절 이후 허드렛일로 내몰리지만 역설적으로 일할 기회 자체는 많아진 중장년 여성들의 고단한 현실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국경을 넘는 서사, 인도와의 합작이 여는 새로운 지평

이처럼 인간 소외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치밀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엮어내는 한국 콘텐츠의 서사 역량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 시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 뉴델리에서 양국 영화 산업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한국과 인도의 합작 영화 ‘아모르(Amor)’ 공동 제작 협정이 공식 체결되었다. 앞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메이드 인 코리아’가 인도 현지는 물론 글로벌 비영어권 1위를 석권하며 플릭스오븐(Flixoven)의 기획력을 입증했던 만큼, 이번 합작 프로젝트에 쏠리는 이목이 상당하다.

K-콘텐츠의 다음 목적지, 글로벌 공동 창작의 시대

문화 교류의 폭은 콘텐츠 제작을 넘어 한층 다각화될 전망이다. K팝 상설 공연장이자 한국 문화의 핵심 해외 거점이 될 ‘뭄바이 코리아 센터’ 설립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K팝과 발리우드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탄탄한 플랫폼이 마련되었다.

뛰어난 기술력과 젊고 역동적인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는 이미 글로벌 문화 산업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 하이브(Hybe)가 2026년 뭄바이에 대규모 지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현지화에 나선 것은 인도 시장의 전략적 가치를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 나라의 문화 교류는 일방적인 콘텐츠 수출을 넘어 서로의 고유한 서사를 존중하는 ‘공동 창작의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 풍부한 문화적 자산과 기술력을 결합한 영상물 제작은 물론, 인재 육성 프로젝트와 양국 국립 박물관을 잇는 문화유산 협력까지 다방면에서 깊이 있는 융합이 시도되고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로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낸 한국의 콘텐츠가 새로운 토양에서 또 어떤 묵직한 서사를 빚어낼지 기대되는 시점이다.

By 박서연 (Park Seo-yeon)